*월간 『미술세계』 2019년 4월호(vol.413)에 수록된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일시: 2019.3.12~4.13
장소: d/p
태초에 신이 거주하는 원형세계(原形世界)가 있었다. 원형세계는 본질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변주한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변주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집합이다. 첫 번째 우주는 이 원형세계 안에 만들어졌지만, 불순물이 많아 금세 붕괴해 버렸다. 이에 신은 원형세계의 본질을 추상화한 두 번째 우주를 창조했다. 하지만 두 번째 우주도 데이터 과부하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멈추고 말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미메시스한 이 장난 같은 언술들은 김용관의 비트맵 애니메이션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는 《네오서울: 타임아웃》의 설정값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전시는 “우주의 용량이 초과되어 우주가 멈추었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이 설정은 “용량이 꽉 찬 서울을 그대로 복제하여 백업시킨 뒤 이를 관찰한다”로 심화되며 작품들을 내용적으로 엮어낸다. 영화 〈매트릭스〉 속 1999년에서 시간이 멈춘 가상도시의 질감을 하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어버린 곳, 폐허가 된 이 도시는 ‘네오서울’이라 불린다.
“구체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에는 무한수의 구체적인 것이 존재한답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 내의 알레고리에 구체적인 디테일을 기입해 넣는다. 최재훈의 〈fragments of 〈Walking on chaos to mandala〉〉는 이 멈춰버린 시공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한 소년의 이미지를 만화의 프레임 컷으로 구성했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이카리 신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 초기의) 무기력한 캐릭터를 극단화한 것처럼 표정이 없다. 분노하다가, 혹은 울다가 그대로 멈춘 사람들 사이를 소년은 때때로 응시하며 걷는데, 결국 광활한 우주공간 속으로 뛰어들어 소멸한다. 만화 프레임 컷들은 곧 하나의 그림이 되어, 만다라 개념과 접붙었다(〈Walking on chaos to mandala〉). 만다라의 의미를 좇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소년은 무(無)가 된 걸까? 혹은 그 역시 데이터의 집합으로 흡수되기로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년은 처음부터 데이터였다. 이카리 신지로부터 파생되는 무기력하고 어딘가 초탈한 듯한, 아무렇게나 머리를 기른 소년. 이러한 캐릭터 유형은 서브컬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이미 그 시뮬라크르들이 양산된 상태기도 하다.
최재훈의 그림 속 화내는 사람들의 표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홍민의 〈정의를 위하여〉와 〈엄연히 다르다〉 연작의 형상이 심층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넷(net)상에서 떠도는 혐오의 말, 서로를 편 가르고 집단 속에 기거하며 상대방을 격분시키는 말들에 신체성을 부여한다. 작가노트에 따르면 이는 “육체를 획득한 텍스트”로, 개체들의 머리카락은 서로 마구 뒤엉켜 있고, 눈깔이 빠져 있거나, 울고 있거나 절규하고 있다. 서로를 뜯어먹었는지 파편화된 신체 조각이 내동댕이쳐져 있거나 머리만 돌아다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태가 모노톤 컬러에 아니메(anime) 그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 속에서는 일말의 구원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다.
디테일을 추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작업이 마주치는 지점도 있다. 김시훈의 〈Temp=E:₩Temp〉에는 폐건물 안에 토해놓은 듯 쌓여 있는 반추상의 더미가 있다. 이는 컴퓨터 시스템 디렉토리에 있는 ‘Temp’ 폴더의 속성을 시각화한 것으로, 그 안에는 시스템 정보의 부산물들이 임시파일로 저장되고 자동으로 삭제되기를 반복한다. 김시훈은 이 임시적인 것들이 쌓이고, 지워지고, 또 쌓이는 과정을 “항상적 임시”로 규정하는데, 그는 한국이라는 폴더가 있다면 이 Temp 폴더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다른 디렉토리로부터 수입한 것들로 채워진, 내재가 아닌 외재로서의 임시 저장물의 사회다. 다시 김용관으로 돌아가 보자. “신이 제공한 우주의 아카이브는 (…) 예를 들어, 조선의 시공간, 일제 강점기의 시공간, 산업화의 시공간, 민주화의 시공간. 혼재된 모더니티의 시공간이 하나의 데이터로 제공되었어요. 데이터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어요.” 이는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의 말미에 나오는 내레이션으로, 잡탕 같은 한국적 모더니티를 은유한 것일 테다.
《네오서울: 타임아웃》은 천미림 큐레이터의 기획 서문에서도 드러나듯 ‘신(新)서울’이라는 증강현실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에 SF적 상상력을 투영한 결과물이다. 전시는 시각예술의 형식을 갖추면서도 SF의 장르적 문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서브컬처라는 공통의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닫힌 구조가 될 위험성을 안고서 출발했음에도 각각의 작품을 형식보다는 내용적으로 엮어내겠다는 의도가 발현되었기에 충분히 ‘재미있는’ 전시 경험을 제공했다. 물론 SF 장르를 작동시켜온 서브컬처의 장(場)도, 시각예술씬도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복잡성 가득한 두 계가 마주치며 냈던 잠깐의 반짝임을 일단 텍스트로 백업해둔다. 백업은 생각날 때마다 해두지 않으면 곤란해지니 말이다.
뒷이야기
신은 더 작은 규모로 세 번째 우주를 만들었고, 멈춰버린 두 번째 우주의 데이터를 압축하여 복사/붙여넣기 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보량이 많은 우주의 데이터를 그보다 적은 곳에 복사하는 과정에서 압축손실과 같은 문제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정보가 복사되는 긴 시간동안 큰 혼란이 초래됐다. 결국 신은 백업된 옛 우주의 데이터를 공유하고 피조물과 직접 소통하는 보상수리 서비스(?)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한 조각가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의 발달로 설 자리를 잃어 삶을 비관하고, 두 번째 우주가 복사되기 직전에 투신자살하였으나 복구 과정에서 운 좋게 살아났다. 헌데 새 인생을 얻은 조각가가 목도한 새로운 우주는 3D 조각 프로그램으로 만든 세계 같았다. “빌딩의 외벽은 매끄럽고, 도시는 완전한 직사각형과 원형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불순물이 제거된 완벽한 추상의 시공간이었답니다.” 이는 미메시스를 미메시스한 세계야말로 기존의 이데아 세계를 대치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어지는 조각가의 공상은 플라톤이 설정한, 이데아가 분유되어 나오는 진행 방향을 거꾸로 뒤집으면서 끝났다. “매끄럽지 않은 질감, 불완전한 직사각형과 원형, 불순물 투성이인 반추상의 시공간 (…) 조각가는 상상했어요. 이것을 오래된 우주에서 모방하고, 그것을 다시 신이 거주하는 원형세계에서 모방하는 상상을. 질감이 생기고, 직사각형과 원형이 불완전해지며, 더욱 더 반(反) 추상의 조각이 되는 모습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