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9.3(vol.412)에 수록되었던 기사입니다.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
2019.1.4~3.31 | DDP 디자인박물관
3·1운동 100주년과 연동해 미술 영역에서 불러들일 수 있는 인물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만한 인물도 없지 않을까. ‘문화보국(文化保國)’, 즉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는 위창 오세창(韋滄 吳世昌, 1864~1953)의 가르침이자 간송 정신의 요체인 만큼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에서 열렸던 간송문화전 제1부의 제목이기도 했다. 간송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기념적 상황과 맞물려 겨레와 민족에 대해 환기하기 좋은 소재다. 물론 저 옛날 기미년에 일어난 봉기와 간송의 관련성은 ‘민족’이라는 열쇳말로 연결되는 정신성의 영역에서만 머무르고 있다. 국민국가에서 3·1운동을 소환하는 맥락은 언제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실상 100년의 시차만큼이나 새삼스럽게 2019년에 민족정신을 환기하는 일의 효과는 공허하지 않은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이하 《대한콜랙숀》)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전시였다. (또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즈음의 이 운동에 대한 인식 지형에는 민족정신과 더불어 다양한 결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간송을 민족주의 서사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 이제는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대한콜랙숀》을 본다면 매우 착잡한 기분이 될지 모른다. 《대한콜랙숀》에서 보여주는 간송은 신화화된 구국 영웅 그 자체이며,전시된 내로라하는 고미술품은 그러한 간송의 민족 영웅적 신화에 그저 봉사하는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되는 고미술품 뒤에는 언제나 간송 전형필이 미소 짓고 있다. ‘알리다’, ‘전하다’, ‘모으다’, ‘지키다’, ‘되찾다’. 《대한콜랙숀》을 나누는 이 다섯 섹션의 동사들에 생략된 주어는 단연 간송일 것이다. 전시는 작품들이 어떤 경위로 간송의 손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히스토리 텔링’ 중심의 편안한 분위기로 꾸려졌다. 하마터면 양반가에서 불쏘시개로 불타 없어질 뻔한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의 〈해악전신첩〉 같은 스펙타클한 일화부터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참가해 터무니없는 가격을 외쳐 가며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손에 넣은 이야기, 일본 주재 변호사인 존 개스비(Sir John Gadsby)의 컬렉션을 사들이기 위해 만 마지기(약 200만 평) 전답을 팔아치운 이야기 등. 기실 간송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대부분 익숙한 레퍼토리이나, 간송을 처음 접한 관람객에게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전시일 것이다. 첫 번째 섹션인 ‘알리다’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고, ‘전하다’부터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되지만 미술품은 마지막 두 섹션인 ‘지키다’와 ‘되찾다’에 집중되어 있다. ‘전하다’에 해당하는 앞부분은 간송이 보성학원을 인수한 이야기와 그 산하의 인쇄소인 보성사가 3·1운동의 중추가 되었던 이야기, 그리고 보화각과 같은 배경 설명에 할애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대를 모은 고려청자의 얼굴마담 격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모으다’ 섹션에 전시되어 5년 전 간송문화전 1부 이후 두 번째로 만났다. 다만 그때만큼의 감동과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 건 매병과 내가 구면이어서가 아니라 전시장 분위기 때문이었다. 구석구석까지 간송 전형필이라는 큰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피로감 탓에 작품을 오롯이 감상하기가 힘들다.
‘지키다’부터는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를 통해 모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일제 강점기 경성,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에서 고미술 경매를 유일하게 전담하는 곳이었는데, 회원제로 운영되어 조선인의 활동은 거의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그 사이에서 문화재를 지켜 냈다. 여기서는 참기름 병에서 국보 제294호로 승격한 〈백화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선두로 추사 김정희의 〈예서대련〉, 〈침계〉를 비롯해 〈백자희준〉, 〈백자궤〉, 〈백자청화철채반룡롱주형연적〉 등의 공예품들이 마치 경매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전문지식이 없는 관람객은 경매에 참가하는 자본가의 시선을 뒤집어쓰고 작품의 아름다움을 품평하도록 유도된다. 이런 디스플레이 방식은 ‘갇스비콜랙숀’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되찾다’에서 역시 비슷한 분위기로 연출된다. 전시물은 상품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유자였던 간송에 대한 선망을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것이다. 앞선 섹션들이 제공하는 정보값을 합하면 그 선망의 대상은 민족 정신의 수호자 정도 되는 숭고한 인물이어야 가능하다는 도식이 완성된다. (물론, 〈청자기린유개향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청자오리형연적〉 등이 가진 형태미와 다수의 고아한 청자들은 심중에 고요함을 가져다주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시 방식 때문이 아니라 미술품 자체의 특성에서 오는 감정이다.)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을 기점으로, 재단 주도 하에 그동안 DDP에서 총 12회의 전시를 개최해 왔다. 이는 간송미술관이 2010년대부터 급증한 대중적 관심에 대처하기 위해 감행한 도전이었다. 그 열세 번째인 《대한콜랙숀》은 ‘간송 DDP시기’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전시이자, 재단 사무국장을 지내다가 2018년부터 관장이 된 전인건 관장이 기획에 참여한 첫 전시라고 한다. 그동안 개최된 간송문화전 1부부터 6부까지는 ‘보화각’, ‘진경산수화’, ‘매·난·국·죽’, ‘화훼영모’, ‘풍속인물화’ 등 소장품을 장르별로 묶어 선보였다면 7번째 전시부터는 ‘간송과 백남준’, ‘신윤복과 미디어’ 등 대중적인 테마 전시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예정된 것이었고, 간송미술관의 방향성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대외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이번 전시 이후에는 정비를 마치고 성북동 간송미술관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예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간직한 보화각과 함께 수장고를 증축한 새 간송미술관에 대한 기대를 감출 수 없다. 다만 DDP 후반기에 보여준 변화된 방향성이 성북동의 새 공간에 펼쳐졌을 때 어떤 그림일지 우려스럽다. 지면을 빌어 공유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종류의 고민으로써, 소위 말하는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양자택일에서 오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간송이 수집한 고미술품들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귀중한 보배들이니만큼 이 미술품들을 보여주는 형식에 더 좋은 방향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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