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8년 3월호(vol.400)에 수록된 글입니다.
제17회 송은미술대상전 / 김영은, 안정주, 오민, 진기종 / 2017.12.15.~2018.2.10. / 송은아트스페이스
국내 미술문화 증진에 기여하고 젊은 미술가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재)송은문화재단의 송은미술대상이 제17회를 맞았다. 이번 송은미술대상전의 최종 4인에 오른 작가들은 김영은, 안정주, 오민, 진기종 작가이며 이 중 김영은 작가가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2천만 원의 상금이, 우수상 수상자들 3인에게는 각각 1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미술상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상금의 액수라는 걸. 송은미술대상의 상금 총액은 여타 기업 미술상들과 비교해봤을 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삼성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은 대상 수상자에게 3천만 원을 지급하고, 두산연강예술상은 미술 부문에 각 1천만 원씩을 지급한다.) 또한 송은미술대상은 상금과 함께 개인전 개최와 해외 레지던시 지원 기회를 제공한다. 송은문화재단과 2016년부터 파트너십을 맺은 런던 델피나 재단에서 레지던시 지원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에 단순히 이력서에 수상내역 한 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 자신의 작업세계를 공유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한편 현재 미술상은 과포화 상태다. 기업에서 연달아 미술상을 마련함에 따라 스타 수상자를 둘러싼 수군거림이나 스캔들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미술상 제도 자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물론이고, 업계의 관심도 미적지근하다. 5년간의 지원자 추이를 보면 제13회 송은미술대상에는 503명, 제14회 441명, 제15회 423명, 작년인 제16회까지 429명의 지원자가 몰렸으나 올해는 302명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번에 잠시 주춤한 숫자만으로 미술상의 미래를 섣불리 점칠 수는 없는 일이다. 관점을 바꿔 5년간의 지원자 수 평균이 약 420명이라고 했을 때, 송은미술대상은 꿋꿋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술상은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제17회 송은미술대상전은 보통의 공모전을 통한 전시들이 그러하듯 이합집산의 느낌을 피할 수는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점은 네 작가들의 작업이 어떤 키워드들에 따라 교집합이 되고 또 풀어지는 구도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심사평에서도 꼽는 바, ‘소리’에 대한 관심이다. 진기종을 제외한 세 명의 작가들이 신작에서 소리를 다룬다. 이 글에서는 전시된 작업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보다는 키워드를 통과하여 수상작들의 의미와 효과를 논하고자 하며, 궁극적으로는 송은미술대상에서 출발해 미술상 제도가 처한 난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 김영은, 총과 꽃, 확성기 스피커, 드로잉, 4분, 가변설치, 2017. ⓒ한혜수
보이지 않는 조형요소
미술이 소리를 다룬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나, 기업이 주관하는 미술상에서 사운드 아트가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미학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위주의, 시각중심적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제 보이지 않는 조형요소로서 소리, 즉 청각이 미적 경험에 있어 중요한 감각이라는 사실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승인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번 수상 결과가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운드 아트란 소리를 매개로 한 예술 행위, 또는 예술적 결과물의 통칭이다.1 이는 사운드 조각(sound sculpture), 사운드 설치(sound installation), 사운드 퍼포먼스 등을 포괄하는데, 중요한 점은 소리가 작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 단순히 조각품이나 영상 작품이 무언가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사운드 아트로 부르기 어렵다. 이 정의에 입각했을 때 김영은, 안정주, 오민 세 작가의 작업에서 모두 소리가 중요하지만 가장 사운드 아트의 원론적인 의미에 가깝다 할 만한 작업은 김영은의 〈총과 꽃Guns and Flowers〉(2017), 그리고 〈발라드Ballad〉(2017)이다. 김영은의 작품에서는 관람자의 청각적 경험이 곧 미적 경험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설치된 스피커의 형태는 기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셈이다.
안정주의 〈사이렌Siren〉(2017) 또한 사운드 설치와 일맥상통하는 경험을 제공하지만, 시각적인 장치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도심의 도로 공사판에서 쓰이는 철근과 천, 빨간 네온 줄조명이 전시장에 조성되어 있고, 교통안전 유도 로봇이 영사되면서 그 움직임에 따라 신디사이저 소리가 들리는 형식이다. 이 역시 사운드 아트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노이즈(noise), 주변음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어딘지 산만하단 느낌을 지우기 힘든데, 이는 대도시에서의 ‘불안’이라는 정서를 암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민 역시 소리를 영상에서 주된 요소로 활용하며, 그 또한 불안을 주제로 삼으나 안정주가 도시라는 외부환경이 유발하는 불안을 지시한 것과는 달리 개인의 불안에 초점을 맞춘다. 오민의 3채널 영상 작업 〈5성부Five Voices〉(2017)는 다섯 캐릭터들―몸 전체, 얼굴, 손, 물체, 소리―이 각자의 결을 드러내면서 엮이고 있다. 이때 발생하는 소음은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서로 섞여 들어가고, 점차 음량이 커지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물리적인 불편함을 유도한다.
▲ 오민, Five Voices(5성부), 3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6분, 2017. ⓒ한혜수
개인적 서사가 사회와 만날 때
오민의 〈5성부〉를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위와 같이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작업의 기본개념은 음악이론에 있고, 음악의 질감을 오민이 빌려오는 까닭은 그가 유년기에 음악을 했던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하는 데 있다. 자칫 작가주의적인 관점에 빠질 수도 있지만, 이는 중요한 지점이다. 어쩌다가 음악이라는 레이어가 개입하고 그것이 작업의 핵심적인 원리로 가동되는지, 그 필연성이 단지 작품 감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기종의 작업을 읽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기종의 〈자연모방의 어려움〉은 본 전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공적이고 또 기예적이다. 그의 작품은 ‘플라이 낚시’에서 물고기의 먹이인 곤충을 최대한 실제에 준하되, 물고기들을 쉽게 포획하도록 유혹적으로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에서의 모방과 유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모방, 재현, 허구와 실재의 관계와 같은 거대 담론들을 건드리기에 그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도 물론 사실이지만, 나는 진기종의 작품 역시 플라이 낚시가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취미임을 모르고 본다면 결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교한 벌레 모형들과 극사실적인 물고기 그림들은 진기종이 ‘작가’여서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마추어 낚시꾼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인가?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진기종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사회의 영역과 마주칠 때 내는 파열음을 작가들은 포착했고 예술의 장 안에서 구체화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이렇듯 구체적인 개인의 서사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공모전에 지원한 작가들을 반드시 평가해야 하는 수상 제도에서 주된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 진기종, 자연모방의 어려움(부분), 혼합매체, 가변설치, 2017. ⓒ한혜수
난점들
“예술은 줄 세울 수 없습니다.” 모 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 성적 산출에 있어 시행되던 절대평가 방식을 상대평가로 강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저항하며 내걸었던 구호다. 상대평가라는 정량적인 지표로 예술을 평가할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며, 학교 본부의 일방적인 조치에 대항하는 조직적 전략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자. 정말 예술은 줄 세울 수 없는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미술상 수상 제도는 예술을 줄 세운다. 특정한 기준에 따라서는 예술도 충분히 줄 세울 수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불투명하며, 위계가 절대화되고, 결국 승자가 독식하는 권력이 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준으로 나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미술상 제도는 평가 기준을 고정할 수도 없고, 최후의 1인이라고 해서 미학적,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를 받는 것도 아니게 됐다. 뭇 수상 소감들을 들어보아도 유수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남들보다 빼어나서 당선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나는 이 말들이 그저 판에 박힌 겸손의 미덕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더욱이 미술상은 이미 우후죽순 늘어나 버렸고, 예술의 자율성 신화, 천재 예술가 숭배의 신화가 무너진 동시대 상황에서 수상 제도가 예전만큼의 독점적인 권위는 구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상이 무기력하게나마 기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 원리를 도입하는 효과도 희미해졌고, 스타 작가의 탄생이 건조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말이다.
결국 미술상 제도의 존속은 점점 생존의 압박과 직결된다는 점에서만 오직 의미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술계 내 주체들이 살아남기 위해 상을 선택하는 한 미술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 바운더리 안에서 고민을 심화해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심보선의 경고3를 따라, 만약 상의 주인공이 수상 작가도 아니고 심사위원도 아니라 결국 기업·기관의 이름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쓴 침을 삼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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