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7년 10월호(vol.395)에 수록된 글입니다.
《Citrus Limetta》 / 강민지 / 2017.9.16-10.8 / 갤러리 스튜디오 148
요즘 향수나 화장품 이름들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시트러스’는 감귤류의 과일을 통칭하는 말이다. 어쩐지 귤이나 오렌지라고 특정하기에는 조금 빈해 보일 때 쓰는 표현인 것도 같다. ‘citrus limetta’라고 했을 때는 라임나무의 학명(學名)이다. 강민지 작가는 어렸을 적부터 식물 키우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2013년에는 라임나무를 인터넷으로 배송 받았다. 문제는 생물이라면 반드시 시작과 끝을 담보한다는 점이다. 3년여의 시간 동안 그가 애정을 주었던 라임나무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무는 작년 정초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 전시는 강민지가 죽인 바로 그 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Growing point〉 1~3, 석고, 유리 섬유, 225x30x30cm, 2017. ⓒ한혜수
작가는 본 전시에 앞서 올해 여름 ‘공에도사가있다’(서울 영등포구 소재 ‘인디아트홀 공’ 별관)에서 〈내 식물은 내가 없는 동안 이야기를 할 것이다〉 퍼포먼스로 같은 소재를 다룬 바 있다. 그 퍼포먼스가 죽은 식물을 애도하는 ‘행위’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그 애도를 어떻게 조각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Growing Point〉가 시선을 끈다. 일견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흰 기둥들은 흰 벽과 조화를 이루는데, 어딘지 가짜 같은, 연출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이다. 그는 전시 공간 전체를 라임나무를 애도하는 신전처럼 꾸미고자 했다. 보통 신전이라고 하면 대리석을 떠올리지만 화이트큐브라는 조건을 거스르지 않는 석고 기둥은 이물감 없이 주변과 섞여들어 간다.
〈Tap Root〉, 석고, 유리 섬유, 25x30x30cm(7ea), 2017. ⓒ한혜수
작품명 〈Growing Point〉는 ‘생장점’을 의미하는데, 이 생장점들 옆의 〈Tap Root〉를 보면 기둥을 구성하는 조형의 단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Tap Root〉의 덩어리들은 마치 속이 꽉 채워진 커다란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이 유닛(unit)은 라임나무가 터 잡고 있던 화분의 안쪽을 캐스팅한 것이다. 작가는 화분의 빈 공간을 채우고 또 비우는 작업을 반복해서 수행했다. 그 뒤쪽 벽면에 있는 작품은 〈37 Irregular〉로, 죽은 나무줄기의 지름을 측정한 값이 원통형 석고들이 됐다. 그런가 하면 〈Spreading Form〉에서는 나무의 전체 형태의 끝점들을 연결해 나무가 차지했던 공간을 시각화했고, 〈Kitron〉은 라임이 택배상자에 배달되어 왔을 당시의 공간점유율을 표현했다.
텍스트 작업 하나(〈Untitled〉)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부재하는 대상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 부피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는 데에 수학적인 계산법을 동원하였다. 동일한 유닛을 더하고 빼거나, 지름을 재거나, 비율을 따져보는 등. 무엇보다 일관성 있게 석고를 재료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재료가 이 전시 주제와 갖는 필연성은 의문으로 남는다. 재료가 풍기는 고전적인 분위기로 인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카데믹한 미술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 고전적인 느낌을 사소한 차원으로 가져와서 유희하는 듯도 하다.
▲ 〈37 Irregular〉, 석고, 가변설치, 2017. ⓒ한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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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ading Form〉, 석고, 유리 섬유, 스테인리스 스틸, 31x41x22cm, 2017. ⓒ한혜수
한편 그의 작업이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점, 특히 죽은 식물을 기리기 위한 신전이라는 콘셉트는 다소 감상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무언가의 상실을 경험했지 않은가. 좋아하던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보편적인 만큼 익숙한 주제이다. 하지만 이 전시가 단순히 애상적인 정서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는, 이 작업들이 상실한 대상을 온전하게 기억하는 일의 근본적인 불가능성, 즉 실패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 있다.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실체는 미끄러지지만, 강민지는 그 불가능성을 극단까지 끌고 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보통 잃어버린 무언가를 인간이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동시에 그 기억이 어떠하다라고 확증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은연중에 알고 있다. 불가능한 것, 실패한 것, 놓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런 행위가 우리 삶을 견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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