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8년 2월호(vol.399)에 수록된 글입니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박영숙 / 《두고 왔을 리가 없다》 / 2017.12.16.~2018.2.17. / 한미사진미술관
2016년 초여름, 본지의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본인은 박영숙 작가를 인터뷰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7년간의 공백을 뒤로하고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미친년·발화하다》 전을 개최하면서 작가가 느꼈던 소회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박영숙 작가는 스토리텔링에 능한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종로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기록가, 인터뷰어가 된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는 박영숙의 신작 프로젝트 〈여성 서사(敍事), 여성 사물(事物)〉의 첫 전시로 ‘여성의 나이 듦’을 다루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는 7명의 여성들에 대한 사진과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기준이라면 8~90대 여성이라는 언급을 통해서 박영숙 작가 본인보다 약 10년 정도 앞서는 ‘인생 선배’들이라는 사실 정도이다. 극단 ‘자유’ 대표 이병복, 서양화가이자 패션디자이너 김비함, 명창 최승희, 서호미술관 대표 이은주, 안동할매청국장을 운영하는 이상주, 김수영 시인의 아내인 김현경, 삼화고속 배영환 회장의 아내 박경애 여사까지 당대의 지식인부터 예술인, 기업인의 아내 등으로 다양한 사회적 계층에 걸쳐 있다.
작품들은 예술로서의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이에 있다. 1년 반 전, 박영숙 전시의 중심이 되었던 〈미친년 프로젝트〉는 예술 사진으로서 철저히 의도된 화면을 보여주었다. 박영숙은 피사체에게 ‘머리털 끝에서 발톱 끝까지’ 연기할 것을 주문하였고, 여러 시각적 장치들을 동원해서 긴 내러티브를 하나의 화면으로 집약시켰다. 그에 비해 이번 신작 프로젝트는 훨씬 편안하다. 작가의 목소리는 뒤로 빠지고 인물들이 전면에 드러나는, 도큐먼트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익숙한 자기 공간에서 줄담배를 피우면서 죽은 남편을 이야기하거나(이병복), 김치냉장고가 보이는 주방 앞에 앉아서 ‘오줌줄기 같은 시커먼 물’에다가 군용 담요를 빨래하던 자신을 회상한다(김현경). 여담이지만 거의 모든 여성들이 고운 꼬까옷을 차려 입고 앉아 있었는데, 익숙지 않은 카메라를 대할 때 뭇 할머니들의 다소간 긴장된 모습과 진지함이 엿보여서 미소 짓게 된다.
인터뷰된 여성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요즘에 특히 논쟁적인 부분과 연결시킬 수 있는데, 이른바 주체로서의 여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고 또 핵심적이다. 근자의 페미니즘 동향 안에서 ‘남성에게 의존하는 여성’의 관념은 사실상 폐기되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박영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오롯이 긍정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사회적으로 여성은 성적 존재로 의미화되곤 한다. 무수한 문화적 표상들이 여성의 섹슈얼리티, 젊음과 아름다움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부역한다. 여자는 서른 살 이후로는 꺾인다던가 하는 무식한 농담들도 그렇고, 익숙한 TV광고에 나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젊은 여배우들이거나 아이돌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는 나이 많은 여성은 섹슈얼한 존재로서 소비되지 않고 배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섹슈얼리티가 여성의 모든 것이 될 수 없으며, 고정된 ‘여성’은 없다. 그렇기에 공인된 섹슈얼리티로부터 멀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여성들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는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전시다. 박영숙의 이번 신작 프로젝트는 시각적인 측면에서 나이 든 여성들의 주름진 얼굴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고, 동시에 꾸미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할머니이자 어머니, 아내, 혼란스런 시대의 산 증인, 누군가의 무엇이자 무엇도 아닌 존재들의 작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구술 기록적 측면에서도 숙연한 힘을 가지고 있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이는 7명의 주인공들이 격변하는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여자로서 살아오면서 두고 온 것들, 즉 그 시간들 속에서 포기하고 감내해야만 했던 것들을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의미라고 한다. 박영숙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과 토대를 인정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끈을 놓지 않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기에, 훗날 그녀가 뒤돌아보았을 때에는 아쉬움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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