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7년 3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동백꽃 밀푀유》 / 강홍구 외 9인
2016.12.19.~2017.2.12. / 아르코미술관 제1, 2전시실
동북아시아 지역 일대에서 자라는 동백나무의 꽃은 다른 꽃들보다 비교적 일찍 몽우리를 맺고, 늦겨울에야 만개한다. 덕분에 하얀 설경과 붉은 꽃, 진초록 잎사귀가 색채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다. 동백꽃의 또 다른 특이점은 시들 때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고 꽃이 통째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꽃이 무더기로 떨어진 바닥은 선연한 붉은 빛의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지금껏 숱한 예술 작품에서 모티브가 되어 왔다. 미술에서는 강요배 작가의 〈동백꽃 지다〉 연작이 떠오른다. 〈동백꽃 지다〉는 강요배의 고향인 제주도의 역사적 비극, 4·3사건을 다룬 역작이다. 물론 강요배는 이번 전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대만에서도 4·3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바로 2·28 사건으로, 집권계층에 대한 분노와 경찰의 발포, 계엄령 선포와 중국 국민당 지원군의 시위대 유혈 진압까지 이르는 일련의 사건 전개는 한국과 대만의 닮은꼴 현대사를 예증하는 하나의 사례이며 왜 ‘동백꽃’의 은유가 사용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역사책이 아니더라도 전시된 작품들에서 좋은 예를 찾을 수 있으리라. 2016 아르코미술관 한국-대만 큐레이터 협력기획전의 일환인 이번 《동백꽃 밀푀유》 전에서는 강홍구, 구민자, 김준, 나현, 신제현 5인의 한국 작가와 천졔런(Chen Chieh-Jen), 위안 광밍(Yuan Goang-Ming), 저우 위정(Chou Yu-Cheng), 류위(Liu Yu), 무스뀌뀌 즈잉(Musquiqui Chiying) 5인의 대만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각의 작품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역사, 국가 권력(폭력)과 힘의 논리, 그에 따라 파생되는 집단기억의 문제, 노동과 이주의 문제 등을 경유한다.
작품들은 반투명한 얇은 장막을 사이에 두고 단절되는 듯하지만 주제적으로 서로 공명하는 데가 있다. 예컨대 강홍구 사진작가는 세종시 개발 과정에서 사라진 마을, 종촌리의 사진을 담담하게 렌즈에 담으며 국가 주도의 개발정책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동시에 2전시실의 천졔런은 〈잔향의 영역〉에서 일제 식민지 정부가 세운 한센병 환자 요양원, ‘낙생원’의 강제 이전을 소재로 삼았다. 두 작품은 국가 권력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공간과 기억에 작동하는지를 암시한다. 한편 무스뀌뀌 즈잉은 힘의 논리가 미시적인 개인의 신체와 행동양식을 제한, 검열하는 현실을 2채널 영상으로 보여준다. 영상의 주인공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손기정 선수와 가수 쯔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는 일장기를 흔들 것을 강요받았으며, 대만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 쯔위는 2015년 뮤직비디오에서 대만의 국기를 든 행위가 중국인들의 공분을 사는 바람에 공개 사과를 해야 했다. 작가는 화면에 카메라의 렌즈와 피사체를 병치하거나, 번갈아 보여주면서 시선의 주체가 되는 권력이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가령 쯔위 앞의 카메라 이면에는 소속사가 있을 테고, 소속사는 중국인 소비자를 놓치기 싫다는 소비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중국인 소비자의 마음에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민국(대만)을 인정하지 않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패권주의,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주변국들의 알력이 작용하고 있다.
위안 광밍의 〈에너지의 풍경〉은 대만의 원자력 발전소와 해수욕장이 병존하는 장면을 드론을 이용해 조감했고, 류위는 〈기차역에 정박한 바보들의 배〉에서 타이페이 중앙역의 홈리스들을 인터뷰했다. 화려한 타이페이 중앙역에서 철저한 타자인 이 홈리스들이 읊조리는 말들은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이야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삶의 고민이 녹아 있거나 때로는 확고한 정치적 선언을 담고 있는 그들의 언어는 ‘나’와 ‘그들’의 구분을 흐린다. 한편 구민자 작가는 자신의 성(姓)인 구씨 가문의 기원을 찾아 나서며 국경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대만의 구씨들을 만나서 최초의 구씨들이 먹었을 법한 당나라식 만두를 요리해 먹는 장을 만든다. 그는 이런 유사 가족적 체험을 통해, 그동안 구축되어 온 성씨 기반의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상적인 것임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양국의 현대사 혹은 사소해 보이는 개인사를 추적하는 작품들이 모여 교집합을 만들고, 또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면서 겹겹이 쌓인 하나의 밀푀유가 됐다. ‘천 개의 나뭇잎’이라는 뜻을 가진 밀푀유는 얇은 파이 반죽 사이사이에 크림을 넣은 달콤한 디저트로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동백꽃 밀푀유》는 그 결들을 하나하나 벗겨낼수록 케케묵은 피비린내에 입맛이 쓰다. 하지만 가끔은 맛없다고 뱉어내지 말고 꼭꼭 씹어 삼켜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피와 살이 된단다, 하는 웃어른들의 야속한 타이름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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