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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Isaac Julien: PLAYTIME》 / 2017.2.22~4.30 /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misulsegye 2016~2019

by hanhs.past 2022. 3. 2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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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미술세계』 2017년 6월호(vol.391)에 수록된 글입니다. 

 

자본을 꿰뚫고 돌파하는 방법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Isaac Julien: PLAYTIME 

2.22~4.30 /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이하 플랫폼엘’)에서 열린 네 번째 전시는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Isaac Julien: Playtime이다. 다른 전시공간들과 플랫폼엘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면 역시 플랫폼 라이브로 대표되는 스크리닝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이 전시의 주인공인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 b.1960)은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영화 감독이자 설치 미술가다. 다채널 영상 설치를 꾸준히 선보여 온 그에게 플랫폼엘은 적절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전시명과 동명의 작품 Playtime(2014)은 지하 2층 플랫폼 라이브에서 상연되고 있었다. 내가 상영이 아니라 상연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작품의 형식 때문이다. 7개의 분할 화면이 동시에, 혹은 시차를 두고 영사되거나 점멸하면서 연극적 효과를 거두기에, 하나의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는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여러 화면으로 눈을 돌리거나 몸을 이리저리 틀어야 했다. 

 

 

 

Playtime은 런던의 펀드 매니저와 아이슬란드의 작가, 두바이의 필리핀 출신 청소노동자 등 크게 세 명의 이야기와 경매사 시몬 드 퓌리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작품에 출연한 사람들 중 다수가 베테랑 배우이며, 장만옥 같은 대스타도 끼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장만옥은 경매사를 인터뷰하는 미모의(?) 리포터로 출연했다).Playtime은 전시 서문에 따르면 곳곳에 자본을 맥거핀으로 기능하게끔 했다. 맥거핀이라면 시쳇말로 떡밥이라는 뜻인데, 이 떡밥들을 경유하다 보면 점차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본은 보이지 않지만 꾸준히 흐르고’, 모습을 바꿔가면서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는 미술시장도 예외가 아니며, 낙찰을 확정하는 경매사의 망치질은 마치 판사의 판결과도 같은 효과(혹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수백 억대의 돈을 만지는 사업가와 그 친구들의 대화는 일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면 마르크스가 뛰어나긴 했어.” “-그리고 그에게는 하이게이트 묘지가 가장 잘 어울리고요.” 모든 것이 물신화된 사회에서 마르크스는 죽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형이상학적인 소리만을 지껄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을 예견했으며, 철학이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던 행동주의 사상가였다. 전시장 2층 비디오 라운지에서 상영되고 있는 Kapital(2013)의 내용은 Playtime과 중첩되면서, 자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Kapital Playtime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Kapital 2013년 런던의 헤이워드 미술관에서의 데이비드 하비와의 공개 대담을 담은 2채널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이 작품에는 최근에 작고한 스튜어트 홀의 질의도 녹화되어 있다. 홀의 질문은 의미심장했는데, 영상에서도 이 부분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그는 하비에게 오늘날 마르크스가 남긴 질문들을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확장시켰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의 마르크스주의가 생산의 이미지에 천착해왔음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소비와 재생산, 나아가 그 재생산 영역의 주체인 여성을 포함하는 젠더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러한 자신의 문제제기가 중심적인 것인지 주변적인 것인지 반문하며 그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촉구하는 듯하다. 한편 데이비드 하비는 어떻게 투쟁 주체를 정체화할 것인가라는 급진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비는 21세기 프롤레타리아의 형태를 다시 상상하며 21세기의 프롤레타리아는 도시의 거주민들로 확장하여 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Playtime에서 자본의 유연성과 그 피할 수 없는 속성, 그 속에서 고통받거나 혹은 이익을 취하는 자본가들을 비추며 미술시장도 성역이 아님을 다소 묵시론적으로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상징적 죽음을 드러내었다면, Kapital에 와서 마르크스는 부활한다. 어떻게 보면 메시아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다.

 

플레이타임전은 마치 마르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관람객에게 숙제를 남긴다. 이는 전시실을 나가며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가벼운 과제는 아니다. 그것은 당면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도대체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묵직한 물음이다. 이에 아이작 줄리언이 내놓은 결과물은 거짓말처럼 아름답다. 이는 미적인 동시에 이론적인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하비의 말을 떠올리며, 우선 한국사회에서 긴급하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투쟁주체로 정체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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