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7.1월호(vol.386) 에 수록된 글입니다.
《길티-이미지-콜로니》 / 이은새 / 2016.11.24~12.22 / 갤러리2
이은새, 〈ㅗㅗ〉, 캔버스에 유채, 145.5x112.2cm, 2016 ⓒ한혜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다. 사회 통념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할 때, 부끄럽거나 죄책감이 들지만 끊을 수 없는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멀리 있지 않다. 마감을 앞두고 게임을 한다던가, 다이어트를 선언해놓고는 야식을 시켜먹는다던가 하는 경험 말이다. 나의 현실을 한계 짓는 억압이 크면 클수록 이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렇다면 이은새의 ‘길티 이미지’들이 주는 쾌감은 어떤 종류의 쾌감인가? 그 이전에, 이 전시작들은 왜 ‘길티 이미지’를 자처하는가?
이는 이미지를 대하는 이은새 작가의 태도 변화를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집회에 참여하며 집회 현장을 사진 찍어 이미지를 수집하던 그는, 눈앞의 현실을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디어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미지 생산주체로서 자신의 작업방식도 선회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얇게 뜬 풍경〉은 세월호 시위 현장의 풍경을 작가 자신의 주관에 따라 ‘떠낸’ 그림으로 그의 길티한 고민이 묻어나는 자기고백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것만 같은 이 그림은 전시장의 깊숙한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갤러리에 들어선 관람객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그림은 〈ㅗㅗ〉, 그리고 전시 제목과 동명의 그림 〈길티 이미지 콜로니〉이다.
이은새가 생산해낸 여성 이미지는 매스미디어 소비자들의 내밀한 욕망이라는 층위를 드러낸다. 이 그림들은 여성의 신체를 전면에 노출시키고 있는데, 특히 〈ㅗㅗ〉에서는 가운데손가락을 치켜든 젊은 여성이 무릎 꿇고 덩그러니 앉아 있다. 그림에 묘사된 ‘소녀’의 자세나 옷가지는 영화 〈은교〉(2012) 홍보 포스터,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달군 로타(ROTTA)의 사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꾸준히 ‘어리고 순결하며 순종적인’ 특성이 소녀다운 것으로서 강화되어 왔다. 흰색 셔츠에 속옷, 체육복이나 세일러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세미누드 사진들은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 넷상에 돌아다니면서 (남성) 이미지 소비자들의 욕망을 간질이는 것이다. 여기에 소녀의 섹슈얼리티(누구를 위한 섹슈얼리티인가?)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진가의 설명이 추가되면 비틀린 욕망에 면죄부가 주어진다.
이은새, 〈바이킹의 소녀들〉, 캔버스에 유채, 162.1x.130.3cm, 2016 ⓒ한혜수
이은새, 〈겹쳐진 눈〉, 캔버스에 유채, 130.3x130.3cm, 2016 ⓒ한혜수
이은새는 〈ㅗㅗ〉에서 이러한 인터넷상의 ‘소녀’ 표상을 캔버스로 가져왔다. 다만 치켜 올라간 가운데손가락과 무심한 시선으로 인해, 이제까지 시선의 객체였던 무명의 여성들은 시선의 주체로 재전유된다. 〈바이킹의 소녀들〉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작년 모 TV방송 연예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된, 유명 여성 아이돌 그룹이 바이킹을 타는 장면을 재현했다. 방송사와 시청자들은 이 여성 아이돌의 굴욕적인 얼굴을 기대했지만 그녀들은 굴하지 않고 위엄(?)을 지켰다. 물론 그 의연한 모습조차 이른바 ‘짤방’으로 불리는 저화질 이미지로 돌아다니며 도처에서 유희되기를 면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은새가 만든 이미지들에서 주제가 되는 여성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찾아내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특히 〈바이킹의 소녀들〉에서 유일하게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소녀만큼은 똑바로 뜬 눈이 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작가의 해석이 투영된 장치인 셈이다. 〈겹쳐진 눈〉의 표현 또한 과장되게 커다란 눈이 뚫어져라 관람객을 쳐다본다.
이은새, 〈입 벌린 점(2)〉, 캔버스에 유채, 116.7x90.9cm, 2016 ⓒ한혜수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은새가 누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이는 〈입 벌린 점〉 연작에서 두드러진다. 〈입 벌린 점〉에서는 흰 셔츠를 벗기 직전의 여성의 상반신을 클로즈업해 가슴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성의 유두 표현을 강하게 규제하는 인터넷 심의 규정을 염두에 두고 비트는 것 같지만, 이 그림에는 제목의 표현대로 ‘입 벌린 점’이라는 또 다른 레이어가 겹쳐져 있다. 입 벌린 점은 가슴의 아랫부분에 묘사되어 있어 점과 가슴 사이로 관람자의 시선을 왔다갔다하게 만드는데, 이 점은 갤러리 왼쪽 벽에 늘어선 연작들 중 〈고추절단기〉의 여성의 얼굴 표정과 도상적으로 일치한다. 입 벌린 모양이 왜 고추절단기인지는 모두들 짐작하는 그 이유가 맞다. 금기를 넘나들며 섹슈얼한 은유를 망설임 없이, 여러 겹의 장치들로 내보이는 이은새의 그림들은 그 자체로 길티 이미지이다.
오늘과 같은 이미지 폭격의 시대에 작가 스스로 작품(work)이 아닌 이미지 생산자를 자임할 때, 그러면서도 갤러리에 작품을 거는 행위로써 관람자들을 만날 때, 우리가 만나는 공간은 이미지의 식민지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전시된 이미지들에 나의 욕망을 투사하며 즐거워하는 이 느낌도 길티 플레져일까? 나만 알고 싶고 가지고 싶은 그림의 맛에 취해 귀갓길이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