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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순옥 / 《무위예찬 In Praise of Inaction》 / 국제갤러리 / 2016.5.13-6.12

misulsegye 2016~2019

by hanhs.past 2022. 3. 2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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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미술세계』 2016.6월호(vol.379)에 수록된 글입니다.

 

 

짐짓 가장하는 비어있음의 미학

우순옥 / 《무위예찬 In Praise of Inaction / 국제갤러리 / 5.13-6.12

 

 우순옥, 〈무위의 풍경(In Praise of Inaction〉, 단채널 비디오 영상, 2014 /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자주 가던 단골 가게들은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사라진다. 책상 위에는 예기치 않게 주인을 잃은 명함들이 늘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살며 당연한 상실을 겪고 상처를 받으며 좌절한다. 그렇지만 일일이 아파할 수만은 없으니, 점차 마음속에서 포기하는 것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세상이 원래 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세파(世波)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가장 즐거웠던 순간과 화려했던 한 때도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이러함에 모든 것은 사상누각에 그칠 뿐이라는 허무가 밀려들 때가 있다. 

 

우순옥 작가는 상실 이후 찾아오는 이 허무를 기꺼이 마주본다. 그가 이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은 무위(無爲)이다. 무위란 노자의 개념으로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둠으로써 도를 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태도를 깔고서 우순옥은 시공간의 단면을 그대로 떠낸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마이크로홈1〉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우순옥〈파라드로잉〉영상, 5 5, 2014/2016. ⓒ국제갤러리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정면에 자그마한 화면으로 〈무위의 풍경〉(2014)이 상영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쾰른 근처에 있는 브루더 클라우스 채플로 이르는 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이 경당으로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은 그 길 자체만으로도 사색과 명상을 하게 하는 곳이다. 실제 시간으로 10여 분 남짓이 러닝타임인데 10배로 늘려 10시간이 된 이 영상은 언뜻 보면 정지화면 같지만 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시차를 두고 보면 다른 장면을 보게 된다. 좌측에 있는 암실로 들어가면 정면에 〈마이크로홈1(2016)이 영사되고 있다. 이번 전시의 모든 영상은 정지화면 같은 롱테이크 영상인데, 〈마이크로홈1〉도 어김없이 영암의 구림마을 호수변의 노을 지는 풍경이 나직한 목소리, 음악과 함께 롱테이크로 보여진다. 맞은편의 〈파라드로잉〉(2014/2016)도 같은 방식이다. 이는 베를린의 군사거점으로 쓰였던 템펠호프 공항 부지를 시민들을 위해 개방한 템펠호프 공원을 담고 있는데, 끝없이 널찍한 이 공간에서 읽을 수 있는 비어있음은 전시 전체를 관통한다.

 

 

〈무위의 정원〉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암실을 나오면 〈무위의 정원〉(2015/2016)이 있는데 전면 창문에 금박으로 “Form is Emptiness is Form” 글귀가 붙어 있는 모양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을 의미하는 이 말은 그가 파리 테러 직후 파리 뷔트 쇼몽 공원에 금가루로 적어 내려간 것과 같은 것이다. 금방 바람에 날려 사라졌던 파리의 글귀와는 달리 한국의 이번 전시에서는 글씨가 투명한 유리에 고정되었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식물들과 함께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상영되는 〈엠티 스페이스-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다〉(2007)를 볼 수 있는데, 성북동 지역의 일상적인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듯 편집한 이 영상 역시 무위의 태도를 반영한다. 안쪽에 설치된 오브제들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온 것들이다. 또한 걸려 있는 평면 작품들 중에 특징적인 것은 〈시간의 그림〉(1983/2016)과 한국으로 돌아올 때 작품을 싸가지고 왔던 보자기의 얼룩을 따라 그대로 스티치를 넣은 작업이다. 〈시간의 그림〉은 1983년 작가가 20대였던 시절 침묵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서 완성한 심연에 관한 작업이다. 보자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비정형의 얼룩을 그대로 따라간 희미한 실의 흔적들도 무위적 태도를 지시한다. 

 

이처럼 작품들을 20여 년 만에 하나하나 모아놓고 보니 무위를 예찬하고 있더라고 작가는 말한다. 사실 무위는 그렇게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노자』의 어느 부분에서도 무위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위라고 하면 산중에서 안분지족하는 산옹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그와 같은 정태적인 개념은 아니고, 만물을 형성하는 도()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나아가 실질적인 통치의 방식이기도 하다. “도는 늘 무위하면서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역설적인 구절은, 무위가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임을 말한다. (이택용, 「『노자』의 무위에 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제72, 2012, pp. 148-154.) 무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일한 의미가 있다기보다 무욕(無欲), 부쟁(不爭), 무사(無事) 등의 태도들을 포괄하는 큰 개념이다.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미술 전시가 무위를 말한다는 사실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인위의 장소인 갤러리 안에서 관람객들은 작가가 행하는 무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가장된 비어있음의 미학이 사실은 부단히도 움직였던 사유의 응축물인 것을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작가는 전시장 뒤편에서 살며시 웃음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도가의 선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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