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6.3월호(vol.376)에 수록된 글입니다.
현대미술에서 동화로, 너와 나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윤석남, 한성옥 지음 / 사계절 / 18,000
책 커버를 넘기면 가늘고 길다란 줄 하나가 한복판에 그어져 있다. 한 장을 넘기면 그 줄이 두 개가 된다. 세 장째, 줄 아래에 나무판자가 덧대어져 그네 같은 모양이 되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 그네 위에는 나무의 그림자와 푸른 돌 하나가 가만히 놓여있고 돌에는 직육면체 상자가 그려져 있다. “겨울 숲 속에서 만난 / 푸른 하늘이 창문에 머무는 / 세상에서 제일 작은 店. 내 방”이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 그리고 글을 쓰라고 말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당부가 떠오르는 인트로다. 이는 스물일곱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가 마흔에 내 방을 갖게 된 한 여성이자 어머니이자 누군가의 딸인, 윤석남이 건네는 이야기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는 현대미술 작가 윤석남의 드로잉 32점과 에세이가 담긴 첫 그림책이다. 제목의 ‘다정씨’는 윤석남이 삶 속에서 만나온 다양한 사람의 단상이다. 한때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작가 자신, 백만 번은 전쟁한 것 같은 남편과 스물일곱에 결혼은 차차 하겠다고 선언한 딸, 홀몸으로 자식을 키우면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았던 작가의 어머니 원정숙 여사, 어느 날 남부터미널에서 만난 할머니 등등. 서로 돌보고 보살핌을 주고받는 다정한 사람들이 바로 다정씨이다.
윤석남 작가(1939~)는 만주에서 태어나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가장 그리고 싶은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이 마흔에 늦깎이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 하에 어머니의 모성과 강인함, 환경 등의 주제를 조각과 설치, 회화를 넘나들며 표현해왔다. 1985년 민중미술 조직 중 하나였던 ‘시월모임’의 회원이었으며, 민중미술 내 여성미술이 부재하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그의 작품 〈금지구역Ⅰ〉이 영국 테이트 컬렉션에 선정되어 화제가 됐다.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작가의 드로잉은 그림책 작가 한성옥의 편집을 거쳐 아름다운 그림동화책이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드로잉 서른두 점은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힘들었던 시기에 그린 드로잉들로, 한때 모든 활동을 접고 일상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 했던 작가의 깊고 담백한 시선을 담고 있다. 책의 형식은 드로잉과 짧은 글이 병치된 형태가 반복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서체가 동시에 쓰이고 있다. 한 서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말투이고 다른 서체는 아무도 들을 길 없을 것 같은 독백이다. 천금 같은 내 강아지를 부르다가도, 나는 지금 꼼짝도 하기 싫다고 읊조린다. 엄마 손은 약손, 하다가도 검은 자루 속에 숨어 숨죽이고 있다. 그네 위에 쭈그리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몇몇 글들을 보노라면 마치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다.
‘어머니’라는 주제와 ‘보살핌의 정서’는 여성주의의 오랜 화두이기도 하다. 여성주의 발달심리학자인 캐롤 길리건은 ‘인간이 과연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하나의 주체로 홀로 서있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타자와의 분리가 아니라 공감, 애착, 연민 등 관계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호의존적인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핌의 가치는 여성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그것이 여성의 독점물이라고 이야기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로 확장되는 보편성을 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윤석남의 작업은 이와 맞닿아있다. 그는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의 신화에 의존하지 않는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는 피안의 숭고한 예술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되어 서로 섞여 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보살피는 주체인 어머니의 맨얼굴을 섬세하게 잡아냈다. 우리 주변의 다정씨들을 살피는 윤석남 작가 역시 다정한 사람일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 책을 우리 집 거실 가운데에, 쉰이 넘었지만 아직 볕 잘 드는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옹크리고 앉아 있는, 나의 다정씨에게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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