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미술세계』 2016.4월호(vol.377)에 수록된 글입니다.
《Endeavorer》 / 채온 개인전 / 2016.3.9~4.4 / 표갤러리
채온, 〈노력하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65.1x53.0cm, 2016
물감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는 재료의 물성, 객관적인 형상의 재현보다 심상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재현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이렇게 무심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단 몇 번의 획만을 그어 표현한 흔적, 성기어 보이는 붓질 사이사이에서 획득되는 화면 안의 긴장과 그로 인한 밀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는 많은 그림들이 취하는 표현 양식이다. 엉성하게 대충 그린 듯한 표현주의 회화들이 일구어 온 미학적 성취는 실로 눈부셨다. 본 전시 도록의 평론을 쓴 홍경한 미술 평론가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사이 톰블리의 그림, 어디선가 본 듯한 여운,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루시안 프로이트와 줄리앙 슈나벨, 필립 거스톤, 프랑크 아우어바흐, 뤼크 튀이만, 수잔 로덴버그, 에릭 하쳇 등의 옛 그림들이 줄줄이 연상된다”고 말이다. 그는 덧붙여 이 젊은 작가가 앞서 열거한 유수의 작가들을 몰라서는 안 된다고 조용히 타이르기까지 한다.
물론 학부 때부터 내가 숱하게 보아 온 졸업전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매년 걸렸다. 채온 작가의 그림을 회화 전공생에게 보여주자 엘리자베스 테이튼, 마를렌 뒤마, 데이나 슐츠 등의 이름들이 술술 나왔다. 그만큼 익숙한 양식이어서 비슷한 그림들의 계보를 작성할 수 있을 정도다. 졸업전시회들이 점차 몇 가지 풍으로 정식화되는 것을 보며 개인적으로 미술대학의 교육에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 그림의 어떤 부분이 나를 멈춰 서게 했는가라는 의문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독창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취향도 아니다. 이 그림은 대체 무슨 변별점으로 말미암아 나를 붙잡아 두는가. 정말로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채온, 〈기차 여행〉, 캔버스에 유채, 40x50cm, 2016
채온, 〈귀신놀이2〉, 캔버스에 아크릴, 72.7x90.9cm, 2016
서울예술재단 포트폴리오박람회 평면부문 최우수상에 빛나는 채온 작가의 작품은 잡지 속에 복제된 이미지임에도 넘기던 페이지를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실제로 그림 앞에 멈춰 섰을 때 그림에서 주되게 흐르는 정서는 두려움, 불안과 공포, 자포자기와 무기력함 등이었는데 이런 정서는 그림을 보는 사람 역시 그와 같은 정신상태로 끌어내려 버린다. 본 전시의 제목이자 대표작인 노력하는 사람(Endeavorer)은 내가 그림의 도상을 바라보기도 전에 미리부터 그 곳에서, 나의 밑바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눈두덩이는 두개골의 안와처럼 텅 비어 있다. 마치 너의 존재의 기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허감을 재확인시키려는 것처럼.
채온 작가의 그림은 예술의 자율성에 기대어 철저하게 인간의 주관에 호소하는 그림이다. 이와 같은 그림을 해석하는 일은 난점에 부딪힌다. 그의 그림에서 특정한 코드의 정서를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회화가 불러오는 주관적인 느낌이 어떠어떠하다라는 단순한 인상비평에 그치면 이는 필자의 혼잣말로만 남게 될 거라는 사실과, 그렇다고 보편의 언어로 환원하는 것이 과연 이 작품들에게 온당한가 하는 점이 충돌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나는 숱하게 비슷한 그림들과 채온 작가의 그림 간의 변별점을 적절한 말로 언명하는 데 실패한 채, 진공상태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불안만이 남았다. ‘두려움을 용기로 마주한 그림은 그림이 되며, 내가 된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심정으로 갤러리를 나왔다. 새하얀 캔버스를 독대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을 존재론적 불안과 두려움의 심리상태, 그 흔적이 다른 희망찬 상승의 메시지보다 더 위안이 되는 것은 나 역시 그와 같은 정동에 사로잡혀 있어서일 것이다. 그 두려움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살아내어야 할 오늘을 마주한다.
채온, 〈노래부르는 여자〉, 캔버스에 유채, 65.1x53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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