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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그리기(drawing)를 추동하는 힘: 오경춘 작가의 그림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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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hs.past 2022. 3. 22.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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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26

*오경춘 할머니의 손녀분으로부터 청탁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담채화 풍의 은근한 색과 물 자국, 질박한 선과 필치들 사이를 밀고 나가는 어떤 힘이 있다. 화분에 핀 작은 꽃, 부서지는 듯한 낙엽 끝의 형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들과 함께한 풍경 등에서 어떤 생생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오경춘 작가의 꼼꼼한 관찰력이 언뜻언뜻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겸허한 그림 작가는 작품들에 구태여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데, 재미있게도 몇몇 그림들을 통해서 작가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에 ‘백송’, ‘보라’와 같은 단어들이 기입되어 있는 경우, 작가가 특별히 시선을 집중하고자 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백송’ 그림에서는 나무의 기둥과 줄기는 과감히 흑색만을 그려 넣어 여백과의 대비를 강조하고, 소나무 잎사귀들을 모두 포착하겠다는 집요함마저 느껴지지만 동시에 벤치에 앉은 두 인물을 그려 넣는 여유를 잊지 않았다. 한편 ‘보라’는 작은 잎사귀들이 무성한 화분 속 보라색 꽃이 돋보인다. 어쩌면 보라색은 오경춘 작가가 즐거이 구사하는 색일 것이다. 다른 꽃 그림에서도 보라색은 단연 눈길을 끈다.

 

 

  오경춘의 수채 드로잉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사생(寫生)이며, 그리기의 대상은 주로 꽃이나 동물, 풍경, 주변 사람들인데, 그중 꽃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민화(民畵) 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화조도(花鳥圖)와 맥을 같이한다. 작년 여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된 《김세종민화컬렉션-판타지아 조선》(2018.7.18.-8.16.)은 민화의 회화성에 주목한 전시로, 민화 특유의 낯설면서 신비한 회화의 영역을 선보였다. 조선 말기의 민화는 직업적인 화원 화가들의 숙련된 회화 실험부터 익명의 ‘서민 화가’들이 그린 어딘지 어눌하고 질박(質樸)한 그림까지 모두 포함하는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한때 이들의 그림은 ‘속화(俗畵)’라며 양반들의 그림과 비교해 평가절하당하기도 했는데, 전근대적 신분 질서가 철폐된지 오래인 오늘날까지도 민화를 둘러싼 오해와 선입견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민화에는 분명 전통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1)  이는 “봉건조선에서 근현대로 가는 전환기 우리의 생각과 모습을 기하 추상과 판타지로 말해주는 언어”2)였으며, 기존의 규범을 깬 상상력으로 충만한 시각성이 드러난 것이었다. 오경춘의 드로잉들이 보여주는 자유로운 화면 구성은 이러한 민화적 계기를 품고 있다. 이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민화에 대해 인정했듯,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에 다름 아니다. 

 

 

  형상(形像)을 붙잡고자 하는 욕구는 곧 예술의 출발점이 된다. 그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형상이든, 마음에 떠오르는 형상이든 이를 포착하고 어딘가에 고정하고 싶다는 욕구는 가장 기초적인 예술의욕(Kunstwollen)인 바, 만약 순수예술에 대해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이 부분일지도 모른다. 예술사회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e, 1858~1905)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그러한 모든 인간의 의욕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만족을 향해 있다. 창조적인 예술의욕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대상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다. (…)” 알로이스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은 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각 시대에 활동한 각기 다른 주체들의 예술의욕을 중심에 두는 것이었으며, 한 시대마다 고유한 양식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는 더 이상 역사가 특정한 목표를 좇아가지 않으며, 발전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다는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조선 말기의 민화 역시 특정 시기 특정한 사람들의 예술의욕을 반영한 결과였고,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그림(그리기)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이제 막 예술 세계로 발걸음을 뗀,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다작(多作)을 이어가는 오경춘 작가로부터 어떤 생명력을 본다. 장황한 말을 보태지 않아도 이미 그의 그림 속에는 자신만의 관찰력을 토대로 한 살아있는 선들로, 무엇보다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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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택, 「회화로서의 민화」, 『미술세계』 2018.9월호(통권 제406호), p.77 

2. 이동국, 「기획 취지」, 『판타지아 조선』, 김세종 민화컬렉션, 예술의전당, 2018,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