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입부터 결말까지 전부 스포일러합니다.
※ 내용이 길어요.
※ * / ★ 표시는 각주(미주) 입니다.
※ 모든 이미지는 유투브 트레일러에서 캡처했습니다. 문제시 이미지는 모두 삭제하겠습니다.
<에놀라 홈즈>(2020)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에놀라 홈즈(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더 커다란 고풍스런 자전거를 타고 쌩쌩 질주하며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다. “Now, where to begin?(자, 뭐부터 시작할까요?)”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 밀리 바비 브라운이 제작·주연한 <에놀라 홈즈>는 셜록 홈즈의 여동생 에놀라 홈즈가 주인공인 설정의 2차 창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하고 있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미 영화를 보고 온 독자일 가능성이 높을 터.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에놀라 홈즈>는 이제 막 세상으로 나가는 에놀라의 성장 이야기로, 그녀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기이자 남성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투쟁기다. **
에놀라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도입부는 언뜻 상투적인 자기소개서의 첫 문단 같을 수 있지만, 위트 있는 연출 덕분에 생각보다 뻔하지 않다. 에놀라라는 독특한 이름은 ‘alone’ 의 철자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이는 낱말 놀이를 좋아하는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 홈즈(헬레나 보넘 카터 분)가 고집스럽게 지은 것.*** 에놀라는 16년간 엄마와 함께 그녀들만의 성(城) ‘펀델 홀’에서 자유분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홈 스쿨링이자 대안교육인 셈. 에놀라는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으며, 유도리아와 물리학 실험을 하고 오후에는 운동하고 격투술을 배웠다. 이는 당대의 일반적인 소녀들이 받을 만한 교육은 아니었다. 이른바 ‘지식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었고, 이는 작품 속 배경―산업화가 가속화되는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이 꿈틀대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예외적이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사건은 에놀라의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가 홀연히 사라지면서부터, 그래서 그녀들만의 안온한 성이 무너지면서부터, 그곳에 에놀라의 오빠들―마이크로프트 홈즈와 셜록 홈즈―이 들이닥치면서 벌어진다.
영화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선형적인 글 구성은 지루하니 이만 하기로 한다. 앞서 나는 <에놀라 홈즈>를 ‘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기이자 남성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투쟁기’로 정의했다. 으레 성장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외부의 억압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다. 에놀라 홈즈의 경우 그녀에게 가해지는 외압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사회의 억압 기제이다. 집에 돌아온 두 오빠 중 큰오빠인 마이크로프트 홈즈(샘 크래플린 분)는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에놀라의 행동, 옷차림, 몸가짐을 위아래로 품평한 후 신부 수업을 위한 기숙학교에 강제로 보내려고 한다. 이는 에놀라를 ‘시집 보내기에 손색 없는’ 한 명의 정숙한 ‘여인’으로 개조하려는 가부장제적 억압이자, 당대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을 일률적으로 들이미려는 정상성 압력이다. 이 두 가지가 착종된 억압을 나는 ‘메인 억압’이라 부르기로 했다. 메인 억압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사라진 엄마를 찾으며 시작되는 에놀라의 모험(가출)이 영화의 큰 줄거리다. 명실상부 추리의 제왕인 셜록 홈즈의 가족답게, 에놀라 홈즈의 이야기도 암호를 해독하고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고 오빠들을 따돌리는 추리물의 요소들을 차용했다. 그렇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에놀라가 맞닥뜨리는 남성 주체들과 그 남성 주체들이 표상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에놀라의 전략, 최종적으로 에놀라가 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1. 대충 에놀라를 스쳐 가는 남자들
1) 마이크로프트 홈즈
아버지가 없는 홈즈 가문의 장남으로, 에놀라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녀를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려는 권위주의적인 인물. 튜크스베리 자작을 암살하려는 자객 다음으로 에놀라의 신변에 위협이 되는 존재. 정상성과 가부장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2) 셜록 홈즈
그 유명한 사립 탐정 셜록 홈즈(헨리 카빌 분). 형제 중 유일하게 에놀라를 이해하는 인물이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형의 권위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체제의 부역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미스테리 사건 뿐. **** 주지해야 할 사실은, 셜록이 미스터리 광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은 그가 차남으로 태어난 덕분에 집안을 돌보는 일은 형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며,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를 둘러싼 체제가 충분히 안락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이디스의 대사를 통해 지적되기도 한다. 셜록은 에놀라의 탐정 선배이자, 유일하게 에놀라를 이해할 수 있는 우방이지만 에놀라의 대적자이기도 하다. ★ 이중적인 상징성을 띠고 있는 인물.
3) 튜크스베리 자작이자 배질웨더 후작(이하 튜크스베리 자작, 루이스 패트리지 분)
기차에서 만난 에놀라의 가출 동지이자 잘생긴 키링남. 귀족다운 오만함과 여유를 가지고 있고, 명석한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친구로 그려진다. 다가오는 의회 내 참정권 투표 보트를 뒤집을 수 있는 열쇠key 인물로 우파 할머니에 의해 고용된 미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다! 이 녀석을 신경 쓰는 에놀라도 덩달아 쫓기는 신세가 되고, 후에는 둘이서 함께 호랑이 굴로 들어가 난관을 헤쳐나가게 된다.
4) 튜크스베리 가(家)의 암살자
튜크스베리 가에서 고용한 암살자로, 튜크스베리 자작을 돕는 에놀라에게 물리적, 실질적인 폭력의 위협이 되는 존재.
2. 출구 전략으로서의 ‘변장(disguising)’
에놀라가 오빠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그리고 튜크스베리 자작의 가출에 얽히면서 그에 대한 미스테리를 푸는 주요 전략은 쉴 새 없는 변장이다. 에놀라의 변장은 크게 다섯 번의 변곡점을 보인다. 1) 가출 당시 복장: 소년, 2) 런던에 도착한 후: (코르셋을 조인) 정숙한 부인, 3) 튜크스베리 가를 찾아갈 때: 미망인, 4) 튜크스베리 가 영지를 탐색할 때: 정원사, 5) 왕립 예술원에서 홈즈 형제를 따돌릴 때: 신문 판매원.
에놀라에게 가해지는 메인 억압이 가부장제적 억압임을 떠올려 볼 때, 이 그물망 같은 남성중심적 세계의 마수를 피해 자기만의 시간과 영역을 확보하는 전략이 이분법적 젠더를 왕복하는 변장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미 사상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그의 문제적인 그리고 기념비적인 저작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는 ‘가장’을 통해 수행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부연 설명하기가 귀찮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찾아 읽어보시길 권한다). 에놀라의 경우 때로는 남성으로, 때로는 전형적인 여성으로 가장(변장)해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젠더를 수행한다. 이러한 젠더 수행의 효과가 가장 극명하게 각축하는 복장은 에놀라의 붉은 드레스일 것이다. 런던 도착 직후, 에놀라는 붉은 드레스를 갖춰 입고 흔한 아가씨답게 티 룸(tea room)에 입장한 다음, 그곳의 주인인 이디스와 주짓수 한 판을 선보인다. 그 후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암살자와의 격투 장면에서도 드레스 차림은 중요한 요소가 된다. 거추장스럽게 휘날리는 드레스 때문에 에놀라는 얕보이고, 그 덕에 남자의 허를 찔러 거리를 벌린다. 그 다음 다시 근접전에서 열세에 몰리게 되지만, 결정적인 일격에서 바로 그 코르셋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3. enola – alone, 이름의 힘
<에놀라 홈즈>의 결말부를 요약하면 에놀라는 혼자지만 외롭지 않다는 것, 혹은 에놀라는 혼자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엄마 유도리아는 꾸준히 에놀라에게 다른 사람, 특히 남자에게 휘둘려선 안 된다고 교육해왔지만, 에놀라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성정을 지녔다. 덕분에 튜크스베리 자작 사건에 지독하게 얽혀 버렸다. ★* 사건의 발단부터 절정까지 에놀라는 오빠인 셜록의 조언을 듣거나, 튜크스베리 자작과 서로 도우며 엄마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에놀라가 극 중 남자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결말부에 와서 전환된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에놀라는 튜크스베리 자작의 제안―무려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살래?’(...)―을 거절하고, 에놀라의 후견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셜록과의 만남도 피해버리고 만다. 통속적인 드라마라면 남자 주인공과 손에 손잡고 행복해졌을 텐데, 공주와 왕자의 이성애 로맨스 계보를 잇는 ‘Happily ever after’ 따위의 결말은 이 영화에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무튼 에놀라enola는 혼자alone가 됐지만, 그녀는 괜찮을 것이다. 유도리아가 아기 에놀라를 안아 올리며 건넸던 축복의 말처럼. ‘You’ll do very well alone, En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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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1. 상냥한 방백
중간 중간 에놀라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영화는 관객들이 지루해 할 만한 포인트, 혹은 부연 설명이 필요한 시점에 능청스럽게 끼어든 에놀라의 방백에 의해 오히려 자연스럽게 과거 회상과 플래시백 되도록 했다. 설명과 양해가 필요한 부분 외에도 어떤 장면들에서 말없이 카메라와 눈을 맞추고 공감을 구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다. 어쩌면 밀리 바비 브라운의 마스크여서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밀리 바비 브라운이 제작자여서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처럼 적극적으로 관객과 보조를 맞추려는 방식은 이 영화에서 무척 상냥한 시도로 남았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볼드한 선언보다는 대화를, 직선적인 주장보다는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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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2. 서프러제트
유도리아가 돌연 사라진 이유, 유도리아와 에놀라가 부단히도 물리 실험을 빙자한 폭발물 실험을 해온 이유,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감추려 했던 엄마의 비밀스러운 결사 모임까지. 홈즈 가의 괴짜 어머니는 서프러제트였고, 의회의 참정권 의결을 기점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전개해나갈 터였다. 영화 <서프러제트>(2015)에서 헬레나 보넘 카터가 ‘이디스’ 역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티 룸 겸 주짓수 도장 운영자 이디스의 출연도 아마 사려 깊게 계획된 오마주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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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3. 후속편 주세요.
제발요.
미주
* 낸시 스프링거의 에놀라 홈즈 시리즈 중, 『The Case of the Missing Marquess: An Enola Holmes Mystery』 원작.
** 대명사 ‘그녀’를 부러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에놀라의 여정에서 에놀라가‘여성’이라는 것이 극중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일반화된‘그’라는 대명사를 쓰기보다 ‘그녀’로 지칭함으로서 에놀라의 사회적 성별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싶다.
*** 후에 밝혀지지만, 엄마가 낱말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 작중 신문을 읽는 모습이 등장해 정치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하나, 부러 그렇게 표명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 뒤로 갈수록 에놀라가 셜록을 이겨먹는 모습이 연출된다. ^^
★* 캐스팅 보트 격인 존재를 구한 덕분에 참정권 의제가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의 진보를 앞당긴 셈이 됐다.